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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리뷰

단편소설의 매력..

요즘 한창 단편 소설들을 읽고 있다.
단편이라 함은 으레 지루하다는 편견 일색이었는데 막상 읽어보니 마무리 되지 않은 듯한 결말이 묘한 매력을 끈다.

여섯 살 짜리 옥희의 시각으로 그려낸 <사랑방 손님과 어머니>는 유교적 통념 때문에 감정을 숨길 수밖에 없는 두 남녀의 사랑에 대한 안타까움과 애잔함이 묻어나고 , 무언가 의미있는 것이 되고자 인내하며 모진세월 기다리는 정호승의 <항아리>는 사십줄 접어든 내게 삶에 대한 진지한 물음을 던져주었다.

특히 재밌게 읽은 작품은 이순원 의 <콘사이스여 안녕>이다.
천재 형과 사는 것이 피곤했던 평범한 나는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이라며 나를 무시하던 형이 대학에 진학하면서 숱한 핍박에서 벗어나게 된다.

환호성을 지르며 맞이한 중학교 생활...세 개의 큰 고개를 넘어 왕복 40리 길을 걸어다녀도 항상 지니고 다녔던 콘사이스 영어사전! 그것은 바로 시골에서 올라온 내가 준욱 들지 않고 무시 당하지 않을 나 란 아이의 상징이었다.

영어 단어도 제대로 모르고 기껏 알파벳을 배울 때였으나 콘사이스는 반 친구와 선생님께 내 존재를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키가 작다고, 촌에서 왔다고 나를 만만하게 보지 마라!

지금은 사물함이 있어 교과서를 들고 다니지 않고 전자 사전이 있어 영어 사전이 그닥 필요치 않지만, 내가 중고등학교를 다닐 때만해도 교과 과목 책은 모두 들고 다녀야 했다. 보통 수업이 6~7교시 까지 있으니 교과서와 노트,어쩌다 주요과목 문제집까지 넣으면 두꺼운 영어 사전은 들고 다닐 엄두를 낼 수 없는 게 당연하다.

어쨌든 작품 속 주인공은 어깨를 짓누르는 가방 무게에 매일 녹초가 되든말든 꾸준히,일관성 있게,오직 한길만 가겠다는 다짐으로 콘사이스를 들고 다닌다. 그러나 존재감이 확 부각되는 기회가 좀처럼 찾아오지 않아 내심 호심탐탐 엿보고 있던 차였다.

그러던 어느 날 기회가 왔다. 국어 선생님이 당시 문교부 장관 이름을 물었던 것이다. 재빨리 교실을 스캔 해보니 아무도 손 드는 놈이 없었다. 나는 재빨리 다른 교과서를 주욱 훑어보고는 드디어 과학 교과서에서 원하는 답을 찾았다.       

`아 드디어 내 필생의 숙원을 목전에 두고 있노라!'

  흥분과 설렘과 긴장 속에서도 의기양양하게 손을 번쩍 들었다. 모두들 `역시' 하는 존경의 눈빛이 가득했다. 나를 우러러보는 듯한 친구들 반응 속에 크고 또박또박한 소리로 과학책을 들어보이며
"문교부 장관의 이름은 검정필 입니다"

순간 포복절도 하는 선생님...영문을 몰라 어안이벙벙한 나는 검정필이 이름이 아니라 문교부에서 검사를 받고 허락하에 발행된 교과서란 뜻인 걸 알았다.
끝까지 성이 검씨 인것이 이상했다는 주인공은 그날 이후로 다시는 콘사이스를 들고 다니지 않게 된다.

천재 형의 그늘에 가려졌던 나의 거창한 시도였는데 웃음거리가 된  마무리는 약간 아쉽기도 하다. 형에게 한방 먹일 수 있었다면 통쾌했을텐데 말이다.

누구나 내 존재를 알리고 싶어한다. 말과 옷차림과 외모를 가꾸면서 마치 그것이 나의 전부인 양 남에게 보인다. 명품을 휘감은 이의 목은 뻣뻣하고 어께는 반쯤 들려있다. `나,이런 사람이거든?' 하며 무언의 신호를 보낸다. 적어도 내가 본 사람들은 그랬다. 부러운 시선으로 봤던  나도 한때 명품에 대한 맹목적인 동경이 있었다. 마치 그것을 두르면 그것들이 내 존재를 알려주리라 생각했다. 더 존중받고 더 대접받고 고귀하게 되어질거라 생각했다.

소설을 읽는 내내 천재에게 가려져 기가 죽었던 나의 울분에 공감하며 형의 그늘에서 필사적으로 도망치고 싶었던 주인공의 허영에 나를 투영시켰다.

결국 돋보이고 싶었던 내가 그저 평범한 나란 걸 인정하면서 작품은 끝이난다. 다시는 콘사이스를 펼쳐 볼 일도 그것들이 나를 들여다본 적도 없이.

갖가지 경험을 통해 인간은 성숙해진다.